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 별밤서재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요약정보 및 구매

1910-1945 도시계획으로 본 경성의 역사 | 식민지 수도는 어떻게 메트로폴리스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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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염복규
  • 이데아
  • 2016-11-30
  • 9791195650132 (119565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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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1910-1945 도시계획으로 본 경성의 역사 | 식민지 수도는 어떻게 메트로폴리스가 되었나
책 상세소개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서울, 엄밀히 말하면 ‘현대 서울’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놀랍게도 현대 서울은 식민지 시기 경성의 청사진(blue print)과 겹쳐진다. 물론 많은 변화가 있어왔지만 기본 골격과 변화의 방향은 해방 이전, 1910년에서 1945년 동안 설계되어온 바탕에서 기원한다. 당연히 설계자들은 ‘우리’가 아닌 ‘일본 제국’이었다. 그렇다면 일제는 경성을 어떻게 만들고자 했을까? 나아가 해방 이후 우리는 식민지 수도 경성에서 벗어나, 혹은 극복하면서 어떻게 현대 서울로 변화시켜 왔을까?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은 책 제목에서 은유하듯이 1910년 병합부터 시작된 식민지 수도 ‘경성의 탄생’과 도시 개발의 과정을 통해 지금에 이르는 현대 ‘서울의 기원’을 풀어내고자 한다.





목차
프롤로그·4

1장 제국의 문명, 도성을 해체하다

1 경성을 격자형 도시로 만들어라 17
조선총독부의 경성 도심부 공간구조 재편 구상
2 수도의 정비, 식민통치5 주년의 ‘치적’ 25
1910년대 전반 경성시구개수 주요 노선의 부설 과정
3 식민지 권력의 ‘문명’, 식민자의 ‘사익’ 43
총독부 시구개수의 지향과 재경성 일본인 사익 추구의 충돌

2장 종묘관통선, 전통/근대/식민의 교차로

1 총독부, 종묘를 헐어 길을 내려고 하다 53
종묘관통선의 최초 부설 시도와 갈등
2 10년의 공사, 10년의 갈등 66
순종의 사망과 종묘관통선의 ‘완성’
3 ‘종묘의 존엄’인가, 시민의 ‘편의’인가 78
종묘관통선을 바라보는 조선어 언론의 다면적 시각

3장 도시계획을 둘러싼 갈등과 ‘정치’

1 ‘경성 도시계획’, 새로운 갈등의 시작 89
1920년대 경성 도시계획 논의와 시구개수 이관 문제
2 ‘친일파’가 ‘조선인’을 대변하는 역설 96
경성부의 수익세 제정 시도와 찬반 논란
3 갈등의 봉합, 식민통치의 임계 108
경성부의 시구개수안 조정과 시구개수 이관

4장 ‘대경성’ 마스터플랜의 형성

1 마침내 ‘대경성’이 되다 119
경성부 행정구역 확장 논의의 전개와 귀결
2 용도별 구획과 계층별 위계의 형성 133
경성시가지계획의 기본 구상
3 경성, 근대 도시의 ‘내실’을 갖추다 137
가로망, 토지구획정리, 지역제의 세부 계획안
* ‘도시’ 계획령에서 ‘시가지’ 계획령으로

5장 전쟁이 이끌어낸 도시계획, 전쟁에 가로막히다

1 재정난, 자재난, 인력난의 악순환 181
가로망 부설 사업의 지연과 동원의 한계
2 외곽 공업지역과 주거지역 개발 192
토지구획정리의 전개과정과 ‘개발’ 양상
3 폭격에 대비하여 공지를 확보하라 217
‘방공’ 논의와 공원계획·풍치지구 지정
* 청계천, 식민과 근대를 가로질러 흐르다

6장 도시 유토피아, ‘교외’의 탄생과 죽음

1 ‘전원도시’라는 꿈 혹은 신기루 247
식민지 시기 ‘교외’ 개념의 형성
2 ‘당신들의 전원’, 남산 문화주택지 252
남산주회도로의 부설 과정과 사회적 갈등
3 근대적 도시 중산층 커뮤니티의 탄생 265
돈암지구 구획정리와 주택지 형성의 특징
* 전쟁과 주거 공공성 환기의 역설

7장 도시계획의 두 얼굴, 빈민의 구제와 배제

1 ‘토지의 불법 점유자’, 토막민 303
경성지역 빈민주거의 실태
2 철거와 저항 311
경성시가지계획의 시행과 빈민주거의 박탈
3 도시계획과 빈민의 ‘포섭’, 예정된 실패 319
경성부 빈민주거대책의 전개와 좌절

8장 ‘경성’에서 ‘경인’으로

1 대륙 침략과 병참기지 ‘경인’ 335
지방·국토계획론 도입과 경인지역의 위상
2 경인 메트로폴리스 환상곡 343
경인시가지계획의 배경과 전개
3 ‘수도권’ 구상의 기원과 궤적 355
‘광역도시권’ 구상과 경인시가지계획의 수정

에필로그·368
주·374
참고문헌·404
출판사 서평
식민지 수도 경성은 어떻게 서울을 잉태했는가?
경성은 일본이 도입한 서구의 도시, 한국적 근대의 한 단면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서울, 엄밀히 말하면 ‘현대 서울’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놀랍게도 현대 서울은 식민지 시기 경성의 청사진(blue print)과 겹쳐진다. 물론 많은 변화가 있어왔지만 기본 골격과 변화의 방향은 해방 이전, 1910년에서 1945년 동안 설계되어온 바탕에서 기원한다. 당연히 설계자들은 ‘우리’가 아닌 ‘일본 제국’이었다. 그렇다면 일제는 경성을 어떻게 만들고자 했을까? 나아가 해방 이후 우리는 식민지 수도 경성에서 벗어나, 혹은 극복하면서 어떻게 현대 서울로 변화시켜 왔을까?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은 책 제목에서 은유하듯이 1910년 병합부터 시작된 식민지 수도 ‘경성의 탄생’과 도시 개발의 과정을 통해 지금에 이르는 현대 ‘서울의 기원’을 풀어내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아래와 같은 질문들과 만나면서 자연스레 과거의 경성과 현대의 서울을 하나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경성의 도시 개발은 제국의 문명이었다?
● 왜 을지로 개발을 둘러싸고 일본인들이 반대했을까?
● 조선인들은 왜 조선 황실의 존엄이 아닌 도로의 편의를 선택했을까?
● 경성 도시 개발을 둘러싸고 친일파는 왜 조선인을 대변했을까?
● 일제는 왜 청계천을 복개하려 했을까?
● 해방 이전 ‘강남’은 불모지였고 영등포가 주목받았을까?
● 식민지 시기 ‘부동산 투기열’과 이로 이득을 본 자들은 누구였을까?
● 남산 자락은 어떻게 부촌이 되었을까?
● 서울의 주요 주거지는 식민지 시대 만들어진 중산층들의 ‘베드타운’(신도시)이었다?
● 일제의 ‘신도시’ 건설에 쫓겨난 식민지 철거민들은 어디로 갔을까?
● 경인고속도로, 경인운하…1일 생활권, 수도권 서울은 일제의 계획이었다? 지금, 이곳, 우리에게 식민지 시기란 무엇인가? 쉬운 듯하지만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식민지 시기’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1910년 8월 병합에서 1945년 8·15에 이르는 시기 식민지 수도 경성의 변화상을 살피고자 하는 이 책은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더불어 도시는 고대부터 존재한 것으로 근대의 고유한 산물은 아니다. 그러나 도시를 가리켜 “근대성의 산실이자 임상실험실이며 도서관”이라는 표현에 알 수 있듯이 도시는 근대를 대표하는 현상이다. 식미지 시기 경성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의 현대 서울을 이해하려면 식민지 시기 경성을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이다.
식민지 시기 일제는 경성이라는 공간에 여러 변화의 지층을 남겨놓았다. 이는 서울을 비롯한 한국 도시 발달의 전제가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여러 도시에서 식민지 도시 개발의 ‘지층’이 발굴된다. 비단 물리적 공간에만 한정되지도 않는다. 오늘날 도시 개발을 둘러싼 제도와 계획들은 어떠한가? 오늘날 날마다 목도하는 도시 개발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식민지 시기에서 찾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경성의 변화(도시 개발)를 살펴봄으로써 식민지 시기 처음 대면한 근대의 실체, 그리고 그 유산의 존재가 지금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책은 강조하고 있다.경성은 ‘일제의 도시’가 아니라 ‘일본을 경유한 서구’의 도시이다식민지 시기 경성은 수도로서 특별한 지위를 잃었다. 공식적으로는 일제의 일개 지방도시, 구체적으로는 일제의 ‘외지’인 식민지 조선, 더 나아가 경기도 도청 소재지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500여 년간 수도였던 서울의 ‘역사성’을 일제가 무시할 수는 없었다. 또한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식민통치의 핵심 기구가 밀집한 도시로서 경성은 식민지 ‘수도’ 역할을 수행했다. 이런 가운데 일제는 경성의 도시공간을 개조하기 위해 여러 시도를 지속했다. 이를 둘러싸고 벌어진 다양한 갈등과 결과의 방대함은 다른 도시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런 탓인지 20세기 한국 도시의 발달은 전국 도시의 ‘서울화’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식민지 시기 경성의 변화는 8·15 이후 서울의 변화로 연결되었다. 나아가 현대 한국 도시의 변화와 맞닿아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한편 식민지 시기 경성은 서구와 대비되는 일제 식민지 도시 건설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일반적으로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 도시는 ‘식민자의 도시’와 ‘식민지민의 도시’를 인위적으로 분리한 공통점이 있다. 이런 ‘분리’는 아시아, 아프리카 곳곳에 건설된 서구 식민지 도시에서 발견된다. 예컨대 인도에서 무굴제국의 옛 수도인 델리(Old Delhi) 옆에 온전히 영국인만을 위한 뉴델리(New Delhi)를 건설한 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일제는 식민지 도시 건설에서 인위적인 분리를 명확하게 시도하지 않았다. 물론 도시 내부에서 식민자와 식민지민의 거주와 활동 영역이 자연스럽게 나뉘는 경향은 있었지만, 적어도 식민지 권력이 공식적으로 분리를 강제하지는 않았다.
또 일제 식민지 도시의 외관과 내면은 일본의 전통적인 무엇과 일본이 서구에서 도입한 무엇이 뒤섞여 있었다. 그 중에서도 결정적인 것은 후자, 즉 경성은 일본이 서구에서 도입한 도시의 구현이었다. 이는 도시뿐 아니라 일제 식민통치의 고유한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본은 제국주의를 자처했지만 그 실체는 ‘일본이 도입한 서구’ 혹은 ‘일본을 경유한 서구’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적 근대의 비밀은 서구와 직접 대면하지 못하고 일본을 경유한 서구와 대면했던 사정을 이해했을 때 비로소 풀린다.재경성 일본인, ‘제국의 문명’에 반기를 들다‘무단통치기’인 1910년대 경성의 도시 개발(주로 남대문과 을지로 일대)을 둘러싸고 갈등이 발생하는데 상대적으로 조선인보다 경성 거주 일본인들의 저항이 거셌다. 주로 토지 보상을 둘러싼 일본인들의 ‘사익’과 충돌한 것이다. 남대문·남대문정거장[지금의 서울역] 구간과 황금정통[지금의 을지로]은 공통적으로 공사 자체보다 도로 부지를 취득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최종적인 이유는 총독부의 매수 교섭에 완강하게 반발하는 일본인 토지 소유자 하마오카와 마츠모리 때문이었다. [중략] 1880년대부터 1910년 전후까지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 중에는 일본에서 사회적 지위가 낮고 경제력도 빈한하여 조선에서 한몫을 보려는 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재산 축적에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음은 물론 불법도 서슴지 않았다. 따라서 통감부나 총독부에게서 “제국의 위신을 실추시킨다”는 비난을 듣는 경우도 많았다.(45쪽)일제의 식민지 도시 개발은 일본인을 ‘위해’ 이루어졌다거나 일본인에게 ‘유리’하게 이루어졌다는 인식, 서울의 경우 일제는 남촌의 일본인 중심지 개발에 치중했으며 북촌의 조선인 중심지는 버려두었다는 인식은 지나치게 일면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식민지 도시 개발의 여러 경우를 보면 그런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1910년대 전반 시구개수[경성 중심부 도시개발] 과정에서 식민지 권력은 조선인은 물론 일본인의 사익과도 대립하는 목표를 추구했으며 그것을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했다.(50쪽)황실의 존엄 VS 식민지 조선인의 편의, 일제 VS 친일파현재 안국동에서 이화동에 이르는 율곡로 일부 구간은 종묘와 창덕궁·창경궁을 가로지르고 있다. 이 도로는 1932년 완공되었다. 당시 도로 부설을 두고 조선 황실(순종)과 전주 이씨종약소를 중심으로 한 조선 지배세력과 일반 식민지 조선인의 시각은 달랐다. 일반 조선인들은 ‘종묘의 존엄’보다는 ‘교통의 편리’라는 근대적 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창덕궁·창경궁-종묘 통과 구간의 도로 부설에 대한 조선어 언론의 시각은 적어도 종묘의 전통적 위상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정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교통의 편리’라는 ‘근대적 기준’을 식민지 권력과 공유하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준에 따라 도로 부설이라는 ‘근대적 개발’에서 식민지민을 차별한 식민지 권력을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다.(84쪽)

더불어 ‘친일파’들이 종로 상권을 둘러싸고 ‘조선인’을 대변하는 기현상(?)도 나타났다. 전통적인 조선인의 경제활동의 중심지인 종로가 개발 대상지가 되자 등장한 갈등이었다.총독부는 경복궁 신청사 준공이 눈앞에 다가온 1925년 들어 비로소 종로의 시구개수를 시작했다. [중략] 예산이 부족한 상태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일단 도로 예정선보다 넓은 면적을 수용하여 준공한 다음 수용했던 토지를 다시 매각하여 공사비 결제에 충당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원래 노변에 점포를 가진 조선인 상인은 이를 매수할 재력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반해 “연고가 없는 내지인들[재경성 일본인]은 사려고 야단들”이었다. 총독부도 처음에는 이 토지를 연고자, 즉 토지를 수용당한 노변의 상인들에게 매각할 계획이었으나 그것이 불가능하면 “일반 유지자(有志者)에게라도 팔 수밖에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이렇게 되면 원래 조선인 점포가 자리 잡고 있던 도로에 접한 토지는 자연스럽게 일본인 소유가 되고, 조선인은 이면의 지가가 낮은 토지를 매수하여 다시 점포를 개설할 수밖에 없었다. 도로변 토지의지가 상승을 전제로 수익자에게 부담을 지운 결과, 재력이 풍부한 일본인 상인의 종로 진출과 전통적인 조선인 상권의 위축을 가져왔던 것이다.(97쪽)종로 상인의 연합단체인 중앙번영회는 [중략] “시민대회를 개최해서라도 철저한 반대운동을”하겠다고 공언했다.(103쪽) 영등포와 경인, 전쟁을 위한 공업지역일제는 ‘전쟁’을 위한 도시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전쟁을 위한 공업지역의 필요성이 높아진 것이다. 더불어 1930년대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서 경성을 넘어 ‘경인’ 지역으로 도시 개발을 확대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현하고자 했다. 영등포지구는 경성 도심부에서 서남 8km인 영등포역의 서쪽 평야 일대로 경부, 경인의 양 철도 및 1, 2등 도로의 분기점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노량진에 접하며 북쪽으로는 여의도, 한강을 사이에 두고 용산, 마포와 마주 보고, 서쪽 및 남쪽으로는 한강의 지천인 안양천 및 구로천으로 경계 하는 지역으로 거액의 국비를 들여 완성한 견고한 방수제로 둘러싸여 있다. 이 지역은 경성의 공장지대를 앞장서 이끌어 이미 종연방적(鐘淵紡績), 동양방적, 대일본방적 등 우리나라 3대 방적공장을 필두로 경성방직, 조선피혁, 경기염색, 조선제분 등 다수의 대공장이 들어서 있으며 이제 구획정리에 의해 장래 이상적 공장시가지로 발전할 것이다.(194쪽)1941년 일본군의 한 보고서를 보더라도 경인지역은 전력, 공업용수, 교통, 노동력 등 공업 입지상의 여러 가지 조건이 훌륭하여 “국방의 견지에서 대기계공업을 일으켜야 할” 지역이었다. 이렇게 중국 대륙으로의 침략을 위한 병참선의 한복판에 놓여 있다는 것은 경인지역을 둘러싼 도시계획, 즉 경인시가지계획의 운명을 일차적으로 결정짓는 것이었다.(341-342쪽)

도시 중산을 위한 ‘신도시’, 남산의 부촌, 쫓겨나는 조선인 빈민일제는 경성의 인구 급증과 근대적인 형태의 주거지역을 위한 도시 개발에도 박차를 가한다. 근대적인 도시 중산층을 위한 주거지역 그리고 일본인을 위한 고급 주거지역이 개발된다. 한편 현대 도시 개발과 마찬가지로 주변부로 쫓겨나는 철거민, 즉 빈민 주거의 문제도 함께 등장하게 된다. 새롭게 주택지로 조성된 안암정[지금의 안암동]에 새집을 지어 이사 온 [중략] 이들은 같은 넓이의 택지에 같은 형태로 지어진 집을 같은 시기에 구입한, 즉 연령대나 경제력이 비슷하고 분가한 핵가족인 것이다. [중략] 이들 “교원, 회사원, 음악가, 화가, 각기 그럴듯한 직업을 가진 젊은 아버지”들은 전차를 타고 시내로 출퇴근을 한다. 이들은 그전부터 이야기되던 “아츰밥만 먹으면 시내로 일을 하러 드러왓다가 오후 4, 5시가 지나야 비로소 잠자리를 찾아 돌아가게”되는 도시인,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식민지 시기 성장한 새로운 세대의 근대적 도시 중산층이었다.(278-279쪽)[지금의 한남동, 이태원 등 남산 일대의 부유촌은] “앞으로 맑게 흐르는 한강을 껴안고 남으로 남산을 등져 그야말로 배산임수의 이상적 주택지”가 바로 ‘전원도시’인 것이다. [중략] 속속 들어서는 “문화주택”은 “내지인[일본인]의 소유”가 대부분이며, “이 틈박이에 있던 세민들은” “뚝 떨어져 속속 이주하는 정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전원도시는 완성되었지만 그것은 ‘모두의 전원’도, ‘우리들의 전원’도 아니었다. ‘당신들의 전원’이었던 것이다.(263-264쪽)식민지 시기 경성지역의 도시빈민층을 대표하는 명칭은 ‘토막민(土幕民)’이다. ‘토막에 사는 사람’이라는 명칭이 보여주듯이 토막민은 그 주거 형태를 특정한 지칭이다. [중략] 경성부는 1920년대 말부터 토막민 통계를 내기 시작했다. 통계를 낸다는 것은 ‘토막민은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기 시작했다는 뜻인데, 그것은 ‘토지의 불법 점유자’, 그리고 ‘도시 미관을 해치는 자’라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좀더 나아가면 토막민은 “사회에 대한 반항적 감정이 있는 무식한 빈민이 주이며 일부 좌경적 사상을 가진 자”, 즉 일종의 ‘위험 분자’로 인식되었다.(303쪽, 305쪽)1일 생활권, 수도권의 탄생[1938년 《매일신보》] 특집 기사에 따르면 경인 간에 “폭원(幅員) 30m로 훌륭하게 부설될” 신도로는 “경인산업경제 개발의 의용대, 군용도로, 경인지방의 새로운 이상향적 새 주택지를 만드는 데에도 유용한” 도로로서 “직선코스”로 “아스팔트로 포장하고 인도, 차도를 구별”하여 “장래의 경인운하와 현재의 경인선과의 사이에 부설”할 것이었다. 또 이 도로는 경인 간을 “유선형의 초스피-드적인 자동차로 25, 30분 드라이브”로 달릴 수 있어 “더운 날 저녁 이루미네?이 번뜩이는 이 신작로를 달려서 인천 송도유원지나 해수욕장에 목욕을 갓다가 한 두 시간 만에 도라오는 것도 통쾌한 경인지방이 자랑하는 새로운 위관”이 될 것이었다. 자동차 교통의 발달과 더불어 경인을 ‘1일 생활권’으로 통합한다는 ‘미래 구상’까지 엿볼 수 있다.(346쪽)일제는 전쟁의 필요와 더불어 오늘날의 수도권과 유사한 ‘광역도시권’을 구상했다. 그러나 일제의 “경성 중심 ‘광역도시권’ 구상에서는 분명 대도시의 팽창 방지와 위성도시 건설, 도시 간의 녹지 경계 분리와 고속 교통기관을 통한 연결 등과 같은” 메트로폴리스적 이상향은 결국 전쟁과 함께 좌초되었다. 경성의 도시화부터 길게는 오늘날까지도 연장되는 서울의 미래는 일제의 침략 전쟁으로 촉발되었지만 더불어 전쟁으로 왜곡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현대 서울이 고스란히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상품 정보 고시
도서명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저자 염복규
출판사 이데아
출간일 2016-11-30
ISBN 9791195650132 (1195650132)
쪽수 416
사이즈 160 * 221 * 31 mm /733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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