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도시 공주의 탄생 : 별밤서재

근대도시 공주의 탄생 요약정보 및 구매

대한제국에서 일제 강점기까지 우리가 몰랐던 공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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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엮음)
  • 메디치미디어
  • 2021-12-30
  • 9791157062492 (1157062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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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대한제국에서 일제 강점기까지 우리가 몰랐던 공주 이야기
책 상세소개


서울 같은 대도시, 혹은 부산이나 대전, 인천 같은 개항지 혹은 교통요지가 아닌 지역 도시들은 어떻게 근대를 맞이했을까? 《근대도시 공주의 탄생》은 조선시대까지 충청지역을 대표하던 공주가 어떻게 ‘근대’를 맞이했는지 그 구체적인 이야기를 살핀다. 호서의 수부도시였던 공주는 근대의 도전에 직면해 변화를 강요받고 원하지 않는 모습을 수용해야 했다. 근대는 여러 속도, 여러 모습으로 왔다.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가 공주를 지날 수 있었지만 20세기 초의 격변하는 국제정세에서 러시아와 대립하고 만주와 중국대륙을 노리던 일본은 단 1미터라도 대륙과 더 빨리 연결되는 노선을 원했다. 철도가 비켜 간 후 교통상의 이점을 놓친 공주는 충남도청과 지방법원이 대전으로 옮겨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이전의 번성함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신작로와 신식 건물이 들어서고, 신식 교육을 받은 새로운 사람들이 탄생했다. 3.1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유관순도 공주에서 근대 시민의 기초 자질을 익히고 민족의식을 가진 여성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그리고 공주는 ‘교육도시’ ‘역사도시’로 도시 브랜드를 만들어가며 내실을 다졌다. 사랑스러운 문화도시 공주는 이 근대 시간의 위에 서있다.





목차
책을 펴내며

1장 감영에서 도청으로
호서의 중심도시에서 충남의 중심도시로: 공주목·공주부·공주군, 지방행정체제의 변화
8도제의 해체와 23부제/ 호서지역의 3부, 공주·홍주·충주/ 지방행정체제의 골격 13도제
이방인들과 함께 온 근대: 공주의 일본인과 서양인들
일본 속의 공주, 공주회/ 80만 명의 재조 일본인/ 일본인의 공주/ 거리에서 전파된 근대의 개념들
시대의 흐름을 이기지 못한 도청 이전: 도청 유치운동과 이전 반대운동
신경과민으로 보였던 이전 예방운동/ 야망의 크기; 조선총독부 일대 스캔들/ 교통의 변화가 핵심이다/ 교육도시, 문화도시라는 대안

2장 공주도 철도를 원했다
사라진 가능성, 경부선 공주역: 국가 간선철도가 공주를 비켜 가다
도로, 사람과 물자가 오고 가는 길/ 공주를 지나는 조선의 대로/ 국가의 경사가 된 경부선 개통/ 경합하는 경부선 노선들/ 어쩌면 가능했을, 경부선 공주역
100년 후에야 실현된 호남선 공주역: 호남선도 공주를 비켜 가다
경영자와 군부, 서로 다른 목소리/ 대륙행 간선철도/ 호남선 철도는 한국인의 힘으로/ 너무 늦은 도착
공주는 계속 철도를 원했다: 이루어지지 않은 공주의 철도 부설 운동
근대의 상징, 철도/ 옛길의 몰락/ ‘유림의 반대’라는 신화/ 공주에도 철도를!

3장 도시의 변모
역사 공간을 오락 공간으로: 근대 도시공원이 된 공산성
도시의 근대적 상징물, 공원/ 공주의 첫 공원들/ 나무 심기의 문화정치/ 나들이와 소풍 장소, 유락공원 공산성
도시의 얼굴, 새 건물과 신작로: 1925년의 근대도시 공주 투어
공주의 새 모습을 찾아서/ 식견을 넓히는 도시 견학/ 신작로의 양면성/ 도로 교통에서도 소외되다
‘교육도시 공주’라는 도시 브랜드: 근대적 개발과 문화적 개발
새로운 도시 브랜드의 추구/ 근대 교육의 시작/ 공주지방법원의 이전 문제/ 도시 정체성, 도시 브랜드 만들기의 제안

4장 바깥의 눈으로 본 공주
화륜선으로 온 사람, 공주를 만나다: 미국 해군 무관 포크의 공주 방문기
여행자의 기록이 시대를 증언하다/ 남하, 한국의 실상을 몸에 새기는 여정/ 공주에 온 첫 번째 서양 오랑캐/ 물자 풍부한, 깨끗한 도시 공주/ 근대를 전하러 온 사람
순례자로 온 사람, 공주를 만나다: 독일인 신부 베버의 공주 방문기
목격자로서의 사명감/ 첫 번째 서양인 순례자/ 한국인이 되고 싶다/ 한국 천주교 역사의 산증인, 공주/ 애통함과 우정을 담아, 대한만세!

5장 저항하는 도시
17세 소녀 혹은 한 독립운동가의 죽음: 유관순과 공주
백합 서른 송이의 참회/ 뒤늦은 부고 기사/ 공주와 유관순의 인연/ 더 많이 기억되어야 한다
세상 만방에 대한의 독립을 알리다: 공주의 3.1운동
1919년의 공주, 싸움의 기억/ 반감이 쌓이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지역에서 맞부딪치는 민족 갈등/ 3.1운동, 독립과 친일의 세력이 분명해지다
갈등과 위기의 식민지 현실: 1920~30년대 공주의 농민운동과 학생운동
산미증식계획과 식량공급기지로서의 한국/ 그 계획의 이익은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농민들의 절박한 싸움, 소작쟁의/ 양보는 잠시뿐이다/ 학생들의 무기, 동맹휴학/ 식민지 노예교육의 본질을 폭로하다

6장 근대의 흔적을 찾아서
조선에 다시 없는 명소, 도청과 맞바꾼 다리: 금강철교
금강에 다리가 놓이다/ 도시 발전을 가로막은 장애물, 금강/ 왕년의 넘버원; 한강 이남에서 가장 긴 다리
순교의 역사에서 시작한 믿음의 풍경: 중동성당과 요골공소, 황새바위성지
공주의 첫 번째 성당/ 공주와 천주교의 인연/ 믿음의 피신처에 세워진 공소
기꺼이 한국에 헌신한 공주 교회사: 공주제일교회와 선교사 가옥, 선교사 묘역
초가 한 동에서 시작한 역사/ 공주 교육과 민족저항운동의 상징, 제일교회/ 감사하는 마음을 담은 장소
이름의 변화로 읽는 공주의 근현대사: 옛 공주읍사무소와 공주풀꽃문학관
건물이 품은 역사/ 식민통치기구의 얼굴/ 공주에 남은 유일한 근대 관공서/ 언덕 위의 일본식 가옥, 공주풀꽃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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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으로
한국의 근대는 자랑스러운 시간만은 아니다. 공주의 근대도 그러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지나와서 지금의 한국이 있고 지금의 공주가 있다. 이 사랑스러운 문화도시 공주는 수천 년 역사의 연속선 위에 있지만, 가장 직접적으로는 근대 시간의 위에 서있다. _9쪽. 책을 펴내며 중 공주는 23부제 당시 호서지역을 3개로 나눈 공주부 시절보다는 조금 더 관할 지역이 늘어났지만1, 3도제가 도입되면서 더 이상 호서지역을 대표하는 도시는 아니게 되었다. 공주는 호서지역의 중심도시에서 충청남도의 중심도시로 바뀌는 것을 수용해야 했다. 이로써 호서지역의 통합성은 사라졌고, 이후 충청남도와 충청북도는 때로는 협력하지만 때로는 경쟁하는 관계가 되었다. 또한 공주는 이후 행정구역 조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땅을 내어주는 입장이 되었다. 대전과 조치원, 그리고 최근 세종시에 이르기까지 충청권 신흥도시들의 성장과 확장에는 공주의 희생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_30쪽, 호서의 중심도시에서 충남의 중심도시로 중 도청 이전은 근대도시인 대전이 전통도시인 공주를 압도한 사건이었다. 신흥도시 대전이 감격에 빠진 동안 호서의 중심도시에서 충남의 중심도시로, 그리고 이제 그 중심도시 역할을 내려놓은 공주는 차분히 다음을 모색해야 했지만, ‘다음’의 여지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도청 소재지로서 위상을 잃은 대신 1933년에 당시 한강 이남에서 가장 긴 ‘철교’인 금강교를 가설했고, 공주여자사범학교와 공주농업학교 등을 비롯해 각종 교육기관을 설립하면서 교육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춰 나갔다. 도청이 옮겨간 바로 그 이유(교통이 불편하고, 도시의 확장 가능성이 낮다)로 말미암아 이후로도 특별한 산업발전이나 도시발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교육도시, 역사도시, 문화도시. 공주는 그 정체성을 잘 발전시키며 근대도시로서 성장해야 했다._59쪽, 시대의 흐름을 이기지 못한 도청 이전 중 (공주를 지나는) 경부선 3차 답사 노선안은 기존에 있던 한국의 큰 도시들을 연결한다는 점에서, 또한 이후 건설될 호남선과의 연결이 용이하다는 점에서 실제로 건설될 가능성이 높았던 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노선안은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다. 금강을 건너는 교량 건설이 쉽지 않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경부선 공주역의 가능성이 사라진 진짜 이유는 당시의 긴박한 정세 때문이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며 일본과 러시아는 계속 충돌 가능성을 높이고 있었고, 군부는 일본과 대륙을 철도로 연결하면서 단 1미터라도 단축되어야 한다는 강경한 주장을 펼쳤다. 지금의 경부선 노선은 그 일본 군부의 입장이 반영된, 결국 전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공주역의 첫 번째 가능성은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지고 말았다._76쪽, 사라진 가능성, 경부선 공주역 중 연구자들은 공주를 비롯해 여러 지역에 전하는 이러한 유림이나 지역 유지의 철도 반대 이야기를 일종의 ‘기억된 신화’라고 이야기한다. 몇몇 예외적인 사건을 제외하면, 대부분 지역에서 철도 부설을 반겼다는 것이다. 공주 역시 마찬가지여서 철도를 반기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철도를 끌어오고자 했다. 다만 그것이 성사되지 않자, 거꾸로 유림의 반대 때문에 철도가 들어오지 못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지역에서 통용되었다. 철도를 끌어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발적으로 막았다는 말로 바뀐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왜놈의 철도’라는 표현이 ‘유림’이나 ‘양반’과 대비되면서 한층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했다._99~100쪽, 공주는 계속 철도를 원했다 중 공주는 역사도시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백제의 고도로서 부여가 더 강조되고 거기에 많은 지원과 관심이 몰리면서 역사도시 공주는 그 자체로는 특별한 강점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공산성이 백제 왕성이나 충청감영의 첫 번째 발상지로서 주목받지 못하고 유락공원으로 개발된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이후 공주는 해방에 이를 때까지,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교육도시로서 강한 정체성을 갖고 발전해왔다. 그것이 실제 공주의 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여부는 철저한 검증이 필요할 테지만, 교육과 역사를 내세운 ‘문화도시’라는 자부심은 근대적 개발에서 소외된 공주시민들에게 위안이 되었다._155쪽, ‘교육도시 공주’라는 도시 브랜드 중 한국은 이제 막 근대, 혹은 근대서양문명, 근대과학기술과 근대적 사유에 눈을 뜨고 있었다. 서울의 관리와 백성들 사이에서는 ‘서구 문명’이 관심사 중 하나였다. 하지만 서울이 아닌 한국의 다른 지역에서 바라보면 서울도 문명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서울을 외국의 다른 도시들과 비교할 수도 있지만, 그 차이만큼 서울과 한국의 다른 지역의 차이도 컸다. 공주에서 포크는 “이곳 사람들은 편견이 심하고 미신을 믿으며 극단적으로 무지했다.”라고 적고 있다. 그것은 공주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가 그런 말을 할 정도로 공주를 관찰할 여유가 있던 것일 뿐이다. 편견과 미신과 무지는 한국 전체의 일이었다._178쪽, 화륜선으로 온 사람, 공주를 만나다 중 베버 신부가 한국 민중들을 연민과 공감의 시선으로 대했던 것은 그들이 순교자들의 후손, 바로 ‘영웅들’의 후손이라고 생각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국을 떠나는 베버 신부의 마음은 애통함으로 가득했다. 베버 신부는 배를 타고 부산을 떠나면서 몰락해가는 한국 민족의 운명을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안타깝고 연민에 가득 찬 마음을 이렇게 적었다. “마치 한 민족을 묘지로 끌고 가는 장례 행렬을 떠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기분”이라고. 그는 배 위에서 한국을 돌아보며 진심을 다해 이렇게 외쳤다. “대한만세Taihan mansa!” 한국에 처음 왔던 서양인 신부가 넉 달의 여행을 마치고 떠나며 마지막 남긴 말은 ‘대한만세’였다. 베버 신부는 순례자로 와서 한국 민중의 친구가 되어 돌아갔다. ‘대한만세’는 그 친구가 남긴, 기억해둘 만한 우정의 말이었다._205쪽, 순례자로 온 사람, 공주를 만나다 중 유관순은 공주 영명여학교에서 ‘신교육’ ‘근대교육’을 받으며 민족적 자각을 깨우쳤을 것이다. 3.1운동이 시작된 이후 서울에서 내려와 비폭력 운동의 유일한 ‘무기’였던 ‘태극기’를 인쇄한 곳도 공주였고, 1심 재판 과정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기구인 사법 시스템에 맞서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이며 민족의식을 한층 더 단련시킨 곳도 공주였다. 3.1중앙공원의 유관순열사상, 그리고 영명학교 안과 학교 뒤 영명동산에 세워진 유관순 동상들과 안내문, 그리고 공주제일교회 역사관에 만들어진 유관순 초상 조각과 안내문 등은 바로 그 공주와 유관순의 깊은 인연을 전해주는 증거들이다._222쪽, 17세 소녀 혹은 한 독립운동가의 죽음 6일간의 동맹휴학으로 공주경찰서 유치장은 고보 학생들로 꽉 차고 말았다. 당시 학교와 일제 당국도 강경하게 대응을 계속해 재학생의 절반 이상이 퇴학을 당하면서, 공주고보 4회부터 8회까지 졸업생 숫자가 급감하는 일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공립학교 교육은 한국 사람을 일본 천황의 신민으로 개조, 양성하기 위한 식민지 노예교육이었다. 또한 같은 학생이라고 해도 일본인 학생과 한국인 학생 사이에는 차별이 존재해서 언제나 갈등 요소가 잠재되어 있었다. 어느 때든 계기만 주어지면 그에 대한 반대운동이 크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는 차별과 억압에 기반하고 있었고, 아무리 세련된 문화통치를 내세운다고 해도 그 본질은 가려지지 않았다._258~259쪽, 갈등과 위기의 식민지 현실 중 공주는 백제와 조선 그 이상이다. 찬찬히 도시를 들여다보면 백제와 조선의 공주만이 아닌, 다른 시간의 공주들도 만날 수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근대의 공주다. 조선 왕조 말기와 대한제국,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이르는 시간 동안 공주가 지나온 시간들의 사연은 또 각별하다. 앞에서 보았듯 공주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호서지역을 대표하는 도시에서 충남의 행정중심으로, 그리고 결국 그것마저 놓치고 평범한 도시 중의 하나가 되는 시간들을 거쳤다. 인생처럼 도시도 씁쓸한 성장통을 겪는데, 공주는 근대 시기에 마주한 그 성장통을 겪으며 특색 있고 스토리 많은 도시가 되었다. ‘흥미진진 공주’라는 도시 슬로건처럼 지금은 공주가 지나온 시간들이 흥미진진한 사연이 되었다._315~316쪽, 책을 나가며 중
출판사 서평
‘근대’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을까? 지역 도시가 통과한 근대의 시간들, 우리가 몰랐던 근대도시 공주의 이야기식민주의와 근대화를 겪으며 탄생한 도시의 역사를 살핀다 2015년, 공주시 이인면 신영리에 KTX 공주역이 들어섰다. 호남선이 전선 개통한 1914년 이후 무려 100년이 지나서였다. 경부선이 개통한 것부터 따지면 110년이 늦은 것이었다. 경부선과 호남선이 100년 넘게 유지되면서 그 노선이 당연하게 생각되지만 경부선 공주역, 호남선 공주역은 100년 전, 110년 전에 이미 생길 수 있었다. 당시 철도 노선 답사를 위해 여러 차례 조사를 행했는데 그중 공주를 지나는 안이 상대적으로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중국 대륙과 만주로 진출하는 데 안달이 난 일본 군부는 단 1미터라도 더 짧고 빠른 노선을 원했고, 조선의 번화한 도시들과 곡창지대를 연결하는 노선-공주를 지나는 노선-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이 책 《근대도시 공주의 탄생》은 서울 같은 대도시, 혹은 부산이나 대전, 인천 같은 개항지 혹은 교통요지가 아닌 지역 도시 ‘공주’가 어떻게 ‘근대’를 맞이했는지 그 구체적인 이야기를 살펴본다. 한반도에서 가장 이른 구석기 문화의 발흥지이며, 한성시대를 마감한 백제가 왕도로 삼았던 곳, 고려와 조선에서 왕의 피란지로 안전을 제공했던 장소, 그리고 조선 후기에 충청감영이 설치되어 명실상부 호서의 수부도시 역할을 맡았던 도시 공주는 근대의 도전에 직면해 변화를 강요받고 원하지 않는 모습을 수용해야 했다. 충청남북도의 분리 후 충청감영은 충남도청이 되었고, 나중에는 교통상의 이점을 갖춘 대전으로 도청을 보내야만 했다. 충남도청의 이전을 시작으로 공주지방법원처럼 충청이나 충남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기관들이 차례차례 대전으로 이전해갔다. 그 이전의 대가로 공주는 ‘한강 이남에서 가장 긴 다리’라는 금강철교를 얻었고, ‘교육도시 공주’의 명성을 가져다준 여러 학교들을 세울 수 있었다. 근대는 여러 모습으로 왔다. 신작로와 신식 건물이 들어서고, 학교와 병원, 관공서가 세워지며 공주의 면모를 일신했다. 신작로를 둘러싼 민중의 태도는 간단하지 않았다. 민중은 그것이 가져온 편의성을 칭찬하면서도 그것이 또한 침략의 도구임을 간파했다. 백제의 왕성이었던 공산성은 “수다스런 일본 사람들의 소풍 장소”로 쓰이다 결국 유락공원이 되고 말았다.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이 보급되면서 신식 교육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나왔다. 천안에서 태어난 유관순은 한국 여성교육의 개척자 중 한 명인 앨리스 샤프 선교사의 손에 이끌려 공주로 와 영명학교에서 2년간 근대 교육을 받고 근대 시민이 되었다. 서울 이화학당에서 3.1운동을 접한 유관순은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시위운동을 벌이고 체포되었는데 당시 충청지역을 관할하던 공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공주 감옥에 수감되었다. 독립운동가 유관순의 짧은 삶과 공주의 인연이 각별하다. 이 책에서는 1844년 공주에 온 최초의 서양인, 미국 공사관 직원 포크의 여행기와 1911년 순례자로 공주에 왔던 독일인 베버 신부의 여행기도 소개한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초기의 공주를 관찰한 내용이 흥미진진하다. 해군 무관으로 근무했던 포크는 공산성에서 조선 군인과 만나 긴 대화를 나누었는데, 조선 군인은 포크로부터 미국, 증기선, 석유, 철도, 무역… 등 알지 못하던 세상의 이야기를 들었다. 두 군인의 만남에서 ‘근대’가 번뜩이는 순간이었다. 공주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졌던 베버 신부는, 공산성에 올라 금강과 옛 공주 마을을 돌아보고 멋진 기행문을 남겼다. 식민지 조선의 운명을 슬퍼한 베버는 귀국하는 배 위에서 외쳤다. “대한만세!”라고….
상품 정보 고시
도서명 근대도시 공주의 탄생
저자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엮음)
출판사 메디치미디어
출간일 2021-12-30
ISBN 9791157062492 (1157062490)
쪽수 324
사이즈 147 * 217 * 25 mm /568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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