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는 세상에 맞선 유학자 : 별밤서재

변하는 세상에 맞선 유학자 요약정보 및 구매

사교재 김영익(1886~1962)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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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익
  • 너머북스
  • 2019-11-25
  • 9788994606569 (8994606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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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사교재 김영익(1886~1962)문집
책 상세소개
전환기의 유학자, 세변(世變, 세상의 변고)에 맞서다

이 책은 한국사회 대전환기를 살았던 유학자이자 교육자, 사교재 김영익이 남긴 자료를 하영휘 교수(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가 편역한 사교재 김영익 문집이다. 사교재 김영익(1886~1962)이 살았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에 이르는 기간은 한국이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행되는 대전환기였다. 열강의 침입, 동학농민전쟁, 갑오경장, 일제의 강점, 분단, 6·25전쟁, 4·19혁명 등 변혁의 소용돌이가 연이어 일었다. 이에 따라 기독교와 신학문 유행, 신분 해체,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 제도 등 각종 새로운 사회적 변화가 나타났는데, 대부분 유교적 질서와 유학사상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사교재 김영익은 그것을 통틀어 ‘세변(世變, 세상의 변고)’이라고 하고, 거기에 맞서 유교적 가치를 지키기 위하여 평생 노력했다. 전환점에 선 유학자 사교재가 기존의 질서를 지키며 변화를 거부한 것은 숙명적인 일이었다. 사교재 김영익 문집,『변하는 세상에 맞선 유학자』에는 그가 새로 나타나는 각종 근대적 현상을 어떻게 보고 기록했는지, 그리고 거기에 대항할 수 있는 논리를 유교정전과 선유(先儒)의 사상에서 찾아내 정립하고, 그것을 학생들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전파했던 일생의 사업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영휘는 7년간 자료의 선별과 편집, 그리고 번역의 힘든 작업에도 이 문집이 “한국 전근대와 근대 전환기의 사회사이자 유학사상사다. 이 책은 이 두 내용을 겸비하고 있다. 요컨대, 유학자가 근대를 어떻게 보았고, 그 대응 논리로 어떤 사고를 했는가? 이것이 이 책의 주제다.”며 의미를 둔다. 전환기의 유학자가 한국의 근대에 맞선 기록인 것이다.

목차
머리말

가사 歌辭
송곡농사 해방기념 가사_1945년 7월

편지 便紙
신식학교의 학생군사교육 〉 이인서李仁瑞와 임석영林奭榮에게 줌_1908년
공부하는 학동들에 관한 보고 〉 노백老柏 선생께 올리는 편지_1915년 11월
뫼시며 배우고 싶은 마음 〉 간재艮齋 선생께 올리는 편지_1916년 6월 25일
일제의 앞잡이 토이土夷 〉 조재원趙載元 도형道亨에게 줌_1917년 윤2월 16일
변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노백 선생 전상서_1919년 4월
민성民性의 순화는 도道가 높은 학자의 임무 〉 노백 선생께 올림_1919년 7월
강학講學을 그만두고 돌아와서 〉 박계朴?에게 줌_1919년 10월 6일
노백 선생의 제의를 받고 〉 노백 선생께 답함_1920년 1월 24일
스승 노백이 제자 사교재를 선생으로 초빙하는 편지_1920년 1월 23일
섬에 들어가지 않고 다시 강학講學으로 〉 노백 선생의 편지에 답함_1920년 1월 28일
노백,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 상황’_1920년 2월 1일
친구는 섬으로 들어가고 〉 전완全浣에게 답함_1920년 3월 25일
강상綱常을 부지하는 선생, 간재艮齋 〉 간재艮齋 선생께 올림_1920년 7월 9일
최모 문제 〉 이형렬李亨烈에게 답함_1922년 5월
석전강사石田講舍에서 최모에게 절교를 알리는 글_1922년 윤5월 9일
함경도의 동문에게 보낸 편지 〉 허순영許順泳 경천景天에게 답함_1923년 6월
섬으로 들어간 은자隱者에게 〉 김이청金夷淸 병로柄老에게 답함_1923년 8월 6일
공公과 사私 〉 김이청金夷淸에게 줌_1924년 4월
간재艮齋 사후 그 문인들의 난맥상 〉 석농石農 선생께 올림_1924년 8월
철원에서 돌아와 광교산에 은거함 〉 김경하金景河 씨에게 보내다_1933년 7월 보름
일제강점기에 세운 정려각 〉 안재하安在夏에게 주다_1948년 5월
구도의 길 〉 허담許潭에게 줌_1948년 8월
친구의 손자를 가르치며 〉 야당野塘 유득로柳得老에게 답함_1949년 12월
순환과 혁구 〉 본암本庵 국범식鞫範植 사문斯文에게 줌_1954년 정월
견비통 〉 이언경李彦卿에게 답함_1954년 오추梧秋 20일
전쟁 중 실종된 아들을 찾은 친구에게 〉 이재환李載晥에게 줌_1954년 8월 22일
강상이 무너지고 자유와 평등을 외치는 시대 〉 소당小棠 이용구李龍求 씨께 답함_1954년 10월망건 수리 〉 안지산安芝山에게 줌_1955년 4월 25일
강유위와 양계초 〉 이용구李龍求에게 답하다_1955년 6월 8일
안양재실이 잿더미가 되다 〉 사문斯文 김정金鋌에게 답하다_1955년 12월
학천의 스승 문집 간행을 돕는 문제 〉 학천學泉 김하규金夏圭에게 답함_1955년 섣달
31년 만에 전하는 소식 〉 정현모鄭賢模에게 줌_1955년 12월 일
위토位土와 파보派譜 〉 족인 재연在璉 씨에게 답함_1955년 12월 27일
돈만 받고 완성된 족보를 주지 않음 〉 갑수甲洙, 용우容宇 두 종인께 답함_1956년
위토를 마련할 곡식을 보내며 〉 연산連山 단향소壇享所에 보내는 편지_1956년 10월 1일
눈이 머는 아픔喪明之痛(아들의 죽음) 〉 족숙 직현 씨께 올림_1958년 정월
행장行狀을 써주며 〉 조재구趙載九에게 줌_1958년 6월 그믐 하루 전
아들의 요절/담배 선물 〉 전용구田溶九 씨에게 답함_1958년 10월 14일
후사後嗣를 세우는 문제 〉 조장호 씨에게 답함_1958년 12월 8일
족인 김용식의 명절선물을 받고 〉 족인族人 용식容植에게 답하다_1959년 설날
병마와 씨름하다, 족인族人 영달에게 답함_1959년 3월 26일
경서經書 팔기 〉 이재설李載說 언경彦卿에게 보내다_1959년 10월
양재 권순명에게 아들을 보내며 〉 양재陽齋 권순명權純命에게 답함_1960년 2월
몸을 깨끗이 하여 돌아감歸潔 〉 지산芝山 안경익安景益에게 답함_1960년 8월 3일
유학자의 현대정치론 〉 이병용李丙鎔에게 부침_1960년 8월
나라는 어지러워도 산중 세월은 한가하네 〉 종씨 어른 재연 씨에게 답함_1961년 9월 25일
어떻게 올바른 사람에게 투표합니까? 〉 모씨에게 줌

잡저雜著, 서序, 기記, 제발題跋, 계화도일기繼華島日記
석전강사石田講舍 보인계輔仁契 설립문設立文_1917년
담배는 요물이다 〉 탄연설歎烟說을 수궤재 제현에게 보여주다_1920년 3월 13일
고질이 된 흡연 〉 흡연, 쓸데없는 습관_1947년
생일날 두 배 비통한 이유 〉 생일날 아침에 우연히 쓰다_1947년 7월 27일
측은한 독립
‘모교母校’라는 말의 그름_1947년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는 신문화 〉 평화신문을 읽고
석장石丈 찬贊_1956년 12월
포은과 목은의 위차 〉 숙모전肅慕殿 재중齋中에 답함_1959년 7월
삼은각三隱閣의 재유齋儒에게 답함_1960년 5월
목은 이색과 조선의 개국 〉 상촌 신흠申欽의 「휘언彙言」 과 『승국유사勝國遺事』 를 읽고
유학자의 예수교 비판 〉 서교변西敎辨-화지안花之安이 지은 『자서조동自西?東』의 구절을 잘라내어 비판함_1961년 6월
제국주의의 멸인종
일본 오랑캐의 간악한 술수
강대국의 술수
자유의 맹렬함
성현과 범인의 차이는 용심用心에 달렸다
조선 유교의 평가 〉 황의돈黃義敦의 말 뒤에 씀
국가 속의 개인 윤리 〉 이 나라에 사는 의미
양명학 비판
『경서언해經書諺解』의 오류와 오해
간사한 친일 무리의 변신
목민牧民의 도는 무농務農이고, 무농의 근본은 축우畜牛다 〉 축우계서畜牛契序_1914년 12월
가난과 곤궁 〉 유학동柳鶴東 명구鳴九를 송별하는 서序_1923년 9월 2일
『해제준적孩提準的』 서序_1949년 1월
판결사공파보서判決事公派報序_1958년 6월
학사당기學士堂記_1914년 3월
심心은 형이상인가, 형이하인가? 〉 성재가 화서의 심설을 보충한 글 뒤에 쓰다
노백 선생
계화도일기_1922년 6월

전기傳記
학생한공행장學生韓公行狀_1957년
청천당안공행장聽天堂安公行狀_1958년 12월
절부이씨전節婦李氏傳_1950년 3월
현원방씨전賢媛方氏傳
현원김씨전賢媛金氏傳

한담수록 閒談隨錄
『한담수록』 _1920년 2월
서재書齋(글방) 선생
실망
부모를 이기는 자식
신분과 충효
연호年號와 중화中華
유학儒學의 공사公私 개념
유자儒者의 처세

봉래산고 蓬萊散稿
『봉래산고』 〉 봉래음사蓬萊吟社 간판刊板 서_1929년 2월
대추와 앵무새 〉 몽양재蒙養齋의 여러 학생에게 써서 보여주다_1930년 1월 12일
학문은 확고한 마음이 서야 한다 〉 학문에 다섯 장애가 있다_1930년 2월 5일
양성재養性齋 학계學契 서序_1930년 2월 13일
몽양재蒙養齋 일과표日課表 서序
학學의 의미 〉 천덕재天德齋 제생의 질문에 답함
유학자와 은자 〉 사명산四明山으로 가는 옥담거사玉潭居士를 송별하는 서序_1930년 3월 12일

어록 語錄
체용體用에 국한됨이 없다는 설
본연성설本然性說
본연심설本然心說
기질본연설氣質本然說
당초에 기질을 타고났다는 설
오서오경 독서일과표
유학의 기본개념 〉 김용택, 김용덕, 이명용 세 동자에게 답함
자신의 심신에서 실천해야
유학무용론에 대하여
유학교육
네 가지 근본
네 가지 금지
옛 덕을 먹다
의리와 이익
도는 행하기 위하여 배운다 〉 도를 배우는 것이 쓸데가 없고 쓸데가 있는 것
필부도 사회에 책임이 있다
사람과 동물은 체가 같고 용이 다르다
성인의 도
대일통大一統
강상
예의는 다스림이 나오는 근본이다

교훈 敎訓
글과 더불어 사람도 배워라 〉 동몽童蒙 김종만金鍾萬에게 줌_1914년 9월 12일
내 안에 있는 천리와 인욕 〉 안재하에게 줌_1919년 10월 17일
성인聖人을 배워라 〉 수정재守貞齋 제군에게 보여줌_1946년
스스로 너그러워져라 〉 집 아이 각수恪洙에게_1946년
안양사安陽祠 〉 수정재守貞齋 제군에게 말함_1946년 9월 9일
인의仁義야말로 부강하게 되는 길이다 〉 서사書社의 제군에게 말함_1946년
선생으로서 가르치는 어려움 〉 제생諸生[여러 학생]에게 말함_1946년
성인이 바로 천리다 〉 수정서사守貞書社의 제군에게 보여주다_1946년
학자의 가난 〉 족인 상수常洙에게 줌_1946년 10월
뜻이 굳센 사람 〉 족인 화수和洙에게 줌_1947년
가르침에 대하여 〉 수정재守貞齋 제군에게 사과함_1947년 2월
스스로 처신하고 변화하기 〉 집 아이 각수恪洙에게 말함_1947년 2월
면강勉强의 도道 〉 각수恪洙에게 줌_1947년 7월
도가 없는 시대의 사士 〉 헌수憲洙, 태수台洙, 화수和洙에게 훈시함_1948년
곧음을 지켜라 〉 수정재守貞齋 제군에게 보여주다_1948년
성리학의 기본 개념 〉 조규하曺圭夏에게 주다_1948년
이기理氣 〉 희수喜洙에게 줌
자신의 욕심을 극복하라 〉 각수恪洙에게 주는 말_1948년 5월
이 마음을 보존하여 천리를 지킴 〉 서당 학생들에게 훈시함_1948년 8월
곤궁한 시대에 수신修身이 중요하다 〉 수정사 제군에게 보여주다_1949년 설날
배움이 무엇인가 〉 유원호柳元鎬에게 주다_1949년 3월 10일
마음공부가 중요하다 〉 유원호에게 줌_1949년 12월
예禮 〉 김영학에게 줌_1950년 5월
예禮를 따르라 〉 안성순安誠淳에게 훈시함_1953년 3월
일기는 정직하게 써라 〉 안성순安成淳의 일기습장日記習帳을 위하여 쓰다_1953년 3월
『소학』의 「경신敬身」 편 〉 조광현曹光鉉에게 주는 글_1955년 섣달
자유의 비판 〉 김영두金永斗에게 줌_1957년 5월
상도常道를 지켜라 〉 큰아들 각수恪洙에게 주는 말_1960년 3월 20일
안양사安陽祠의 복식과 머리 모양 〉 수궤재守軌齋 벽에 붙이다_1960년 9월
가난과 고난의 의미 〉 윤희천尹羲天에게 써주다_1960년 12월 20일
육식의 절제 〉 검덕첩儉德帖_1962년 정월
자기 마음에 비추어 남의 처지를 헤아림 〉 아무개에게 주려고 쓴 글
인심과 도심, 속안과 도안 〉 안상우安相佑, 정원영鄭元永, 손인장孫仁長, 손한성孫漢成 등 여러 어린이에게 주다
속이지 마라 〉 집 아이 각수恪洙에게 훈시함
『소학』의 실천 〉 외손자 재곤在坤에게
유가가 불가와 다른 점 〉 같은 사社의 제군에게 써서 보이다
나로써 사물을 보라 〉 관동으로 가는 족인 화수和洙에게 주는 말
중화中華와 이적夷狄 〉 유兪 공의 묘표와 노盧 공의 묘지명 뒤에 씀
논어의 의미, 하학상달下學上達 〉 조규하, 이병용, 이명용에게 말하다
재난과 시련 속의 성취 〉 서사書社의 학생들에게 보여줌
집중하여 사색하고 음미하라 〉 주자朱子 편지 중의 독서법
훌륭한 사람과 사귀어라 〉 손자에게 주는 글

종중宗中
족보 편찬의 규례規例 〉 보소譜所에 답함_1956년 정월 18일
파보와 대동보 〉 보소譜所[족보 편찬소]에 답함_1956년 정월
문중과 가문의 의미 〉 보소에 답함_1956년 2월
족보 편찬의 준칙 〉 보소에 답함_1956년 2월 22일
6·25전쟁에 파괴된 사당 〉 양평 종중에 답하는 편지_1956년 9월 20일
족보 단금單金 〉 보소에 답함_1956년
9권 1질 족보 대금 1만 환 〉 김갑수에게 답함_1956년 9월 28일
수포로 돌아간 족보 편찬 사업 〉 종인 갑수甲洙에게 답함_1956년
족보 편찬 범례 〉 종인 갑수에게 줌_1956년 10월 20일
종손宗孫의 개념 〉 종인宗人 원중元中에게 줌_1956년 12월
북촌공의 종손으로 자처하는 봉수 〉 종인宗人 봉수鳳洙에게 줌_1956년 12월
족보의 서문을 써 보내며 〉 족숙族叔 철현徹鉉 씨에게 답하는 편지_1958년 6월
할아버지 항렬 밑으로 양자 가는 문제 〉 족형族兄 택수澤洙에게 줌_1959년 10월
봉수의 소종래所從來를 모른다 〉 종간宗簡_1960년
봉수의 출계出系에 관한 의문점
봉수의 결단

답문答問
친정부모에 대한 여자의 호칭과 동자의 상례 〉 김영두에게 답함
공자와 주자를 존경하고 사모하는 이유 〉 어떤 사람과의 문답_1946년 9월 10일
성리학 〉 족인 태수台洙에게 답함_1947년
강상과 국가 〉 수정사의 제군에게 답하다_1949년
학문의 목적은 하나의 이理에서 비롯된 본연성의 회복 〉 유원호柳元鎬에게 답함_1950년 2월
옥헌玉軒 유해주柳海珠의 효도 〉 문의문묘文義文廟의 제유諸儒에게 답함_1960년
생일날 두 배 슬퍼해야 한다 〉 조규하曺圭夏 군에게 답하다_1960년 1월
유락가流落家의 족보
가르침의 쇠퇴와 반란세력의 발호 〉 어떤 사람에게 답함
적서嫡庶 차별에 대하여 〉 제생의 물음에 답함

산록散錄
가르치고 배울 때의 구차함
임금과 부모를 위한 복수
말세의 비겁자
마음과 육체
벗을 사귀는 도
붕우 간의 공경恭敬
마음의 뜻
마음의 힘
자정自靖
화이華夷의 구분
시비와 음양, 유가의 이분법
성학聖學과 이학夷學
유복儒服과 이복夷服
지知의 개념
양지와 천리
이기理氣
심心
심의 체용體用
보원報怨[원수 갚기]
마음공부
사 士의 책임
부모 공양
이理와 기氣
시속時俗을 따르는 것
상복喪服과 경찰
예와 풍속
국민과 국가
운運, 세勢, 속俗
사 士[학자]
중화와 이적
성리학과 국가
강상과 예의
학자는 우주의 원기
지자智者와 인자仁者
천리와 인욕, 중화와 이적
심心의 체용
재앙의 기틀
마음의 두 갈래
하늘과 사람
인물성동이론
다스림의 요점

원문 原文
책속으로
측은한 독립지금 우리나라 사람이 독립했다고 환호하는데, 그 뜻은 맞지만 그 사정은 측은하다. ‘독립’이라는 것은 남의 세력에 압박당하거나 남의 술수에 속박당하지 않고, 스스로 나의 법으로 스스로 내 권리를 세워 그 실체가 있고 그 명칭이 있어야 의미가 설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남의 세력에 압박당하고 남의 술수에 속박당하면, 빈 명칭만 있고 그 실체가 없어서 의미가 설 수 없다. 어떻게 독립이라고 하겠는가!
미국과 소련이 우리 대한민국을 반으로 나누기로 일본 오랑캐가 돌아가기 전에 이미 약속했으니, 대한민국은 오래전부터 이미 우리 대한민국이 아니었다. 일본 오랑캐가 돌아간 후 두 군대가 삼팔선을 경계로 각각 남북을 점거했으니, 이것이 이른바 저들의 국경이 아닌가? 미국은 우리나라를 미국의 숙번熟番으로, 소련은 우리나라를 소련의 숙번으로 여기고 각각 우리나라에 진수鎭戍했다. 이것이 이른바 ‘통제를 꾀한 것’이 아닌가? 각각 자기 나라 제도와 문물을 시행하니, 이것이 이른바 ‘자기 법을 시행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 옛글을 배척하고 저들의 말과 글을 가르치니, 이른바 ‘우리 민족을 개조하는 것’이 아닌가? 경도京都156)라는 이름을 버리고 시市라고 하니, 이것이 이른바 ‘식민지화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면서 ‘독립’이라고 하니, 이것이 누구를 속이겠는가? 우리를 바보 취급하는 것이 아니면, 나쁜 말이다.
미국이 민주주의를 하니, 자기가 점거한 곳으로 하여금 민주주의를 하게 한다. 소련이 공산주의를 하니, 자기가 점거한 곳으로 하여금 공산주의를 하게 한다. 이것이 저들을 위하여 변화시키는 것인가? 우리 독립을 위한 것인가? 저들이 이로써 우리를 기만하는데 우리가 진실이라고 받아들이면, 어찌 어리석지 않은가? _ 본문 111~112쪽안양사安陽祠의 복식과 머리 모양 〉 수궤재守軌齋 벽에 붙이다_1960년 9월 일찍이 나는 이렇게 들었다. “스승을 존경하는 방법은 다름 아니라 그 도를 존중하는 것이다. 그 도를 굽히고 그 사람을 존경하는 것은 진정한 존경이 아니라, 도리어 누가 되는 것이다.”
이 안양사安陽祠는 우리 선사先師[돌아가신 스승] 간재艮齋 선생을 존경하고 사모하는 곳이다. 존경하고 사모하는 방법이 어찌 달리 있겠는가? 선사의 도를 존중하는 것일 뿐이다. 선사께서 의발衣髮의 의미에 대하여 지키는 것이 아주 엄격했다. 조금이라도 의발을 손상하면, 자손은 보지 않았고, 제자는 학적에서 삭제했고, 붕우는 절교했고, 종족은 족보에서 지웠다. 하나뿐인 손자라도 의발을 손상하면 사당에 고하고 새로 양손養孫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선사께서 평소 실천하신 것이 이러했는데, 돌아가신 후 존경하고 사모하는 자리에서 용납하지 않으신 의발로 함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의리에 합당한가? 의리상 불가하고 예에도 합당하지 않다. 예에 어긋나고 의리를 벗어났는데, 선사의 영혼이 과연 편안하게 흠향하시겠는가? 또 예에 “돌아가신 후 섬기기를 살아 계실 때처럼 하라.”고 했다. 선사께서 살아 계실 때 감히 하지 못한 것을 돌아가신 후 제사지내는 자리에서 감히 하는 것이 어찌 살아 계실 때처럼 하는 것이겠는가? 석농자石農子가 신성재申誠宰에게 답하는 편지에서 말했다. “문묘文廟와 사원祠院의 제향祭享에 개탄스럽게도 모두 양력 월일을 쓰는데, 그것은 관할하는 관청에서 그렇게 하도록 지시하기 때문이다. 우리 선사의 안양사는 그렇지 않다. 만약 그 지시를 그대로 따른다면, 선사의 영혼이 어찌 기꺼이 흠향하겠는가? 차라리 제사를 폐지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만 하는 것이 낫다.” 운운했다. 월일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의발임에랴. 제례를 행할 때 만약 머리카락을 온전히 갖춘 사람으로 수를 채우기 어려우면 그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겠지만, 분향하는 한 사람마저 끊어지면 그 후에는 다른 시대가 된다. 원나라와 청나라 때 성인의 사당과 현인의 사원祠院에 치발?髮 모양을 하는 것에 대하여 누가 시비할 수 있었겠는가? 아! 원나라에 벼슬한 사람이 강좌講座[강의하는 자리]에 오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은 것이 금화金華의 제현이 천명天命이 이미 바뀐 후 힘겹게 버텨낸 법이었다. 오늘 오당吾黨에 어찌 반드시 그런 사람이 없겠는가? 제공諸公은 각자 힘써서 우리 선사의 덕성을 존중하는 가르침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아야 한다. _ 본문 305~306쪽
출판사 서평
유학자의 눈으로 본 전환기 사회사
사교재 김영익 문집『변하는 세상에 맞선 유학자』에는 가사, 편지, 잡저와 서·기·제발·일기, 전기, 한담수록과 봉래산고, 어록, 교훈, 종중, 답문, 산록 등 전통적인 문집 편목 체제에 따라 그가 남긴 자료 중 모두 228편의 글이 실려 있다.
가장 이른 시기의 글은 1908년의「신식학교의 학생군사교육」(31쪽)이다. 신식학교에서는 이미 일제의 압력으로 학생군사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사교재는 이 학생들이 장차 일제의 총알받이가 될지도 모른다 경고한다. 이어지는 문집의 전편에서 새로운 제도와 문물이 점점 확산되던 전환기에 유학의 맥을 잇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절박한 사교재의 심정을 읽을 수 있다. 말년의 편지「경서 팔기」또한 그 맥락이다. 친구가 팔아달라며 맡긴 『논어』,『맹자』등 유학 책을 헐값에 팔고 쓴 편지다. ‘지금은 공자를 공자로 받들지 않고 맹자를 맹자로 받들지 않는 시대’라며 사교재는 변해가는 자기 시대를 말한다.
이 책은 일제, 미국과 소련 등 외세의 지배에 대한 한 유학자의 적극적인 대처는 물론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 등의 신문물에 대한 사교재의 생각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사교재는 반일사상이 강하지만 민족주의자가 아니고 중화주의자이며, 그의 중화주의는 중국 고대의 세련된 주나라 문화를 존숭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정치사상은 부국이나 강병보다는 인의에 기초한다. 이 외에도 한국전쟁 때 실종된 아들을 찾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 함경도 동문에게 보낸 편지에서 19세기와 20세기 초 함경도가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학이 성했음을 알려주는 등 당대의 사회문화적 기록도 담고 있다.
사교재는 기존의 신분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도입되던 시기에, 기존 질서를 지키기 위해 직접 부딪치며 살았다. 그가 지키려고 노력한 기존 질서 중 하나가 종법질서다. 이 책에서 ‘종중’이란 편목 이외에도 사교재는 종법 관계 글을 많이 썼다. 「최모 문제」에서 사교재는 이것을 최모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로 인식했다. 최모가 조상을 날조하여 족보를 만듦으로써 신분을 세탁하는 것은 타고난 분수를 어기는 것이고 양반사회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회적 신분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심화되는 갈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 이 시대에 포은 정몽주와 목은 이색의 위차문제가 생경하면서도 흥미롭다. 6.25 전쟁 후에는 성씨별로 족보를 다투어 편찬했는데 혼란한 틈을 타서 적서(嫡庶) 문제와 위조가 횡행했음을 알 수 있다. 서구적 근대에 대항한 전환기의 유학사상사
사교재가 가장 중시한 것이 유학자를 기르는 일이었다. 그는 그것을 평생사업으로 삼았다. 태안의 학사당, 수궤재, 강원도의 몽양재와 양성재를 거쳐 인생 후반에 다시 태안의 수정재에서 종신토록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가 학생들을 ‘독서종자(讀書種字)’, ‘석과(碩果)’라고 부른 것은 그들로 하여금 유학을 널리 퍼뜨려 장차 삼강오상이 실현되는 사회를 만들 것을 염원한 말이었다. 사교재의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변화는 점점 더 거세지고 사람들은 대부분 변화를 뒤따르는 쪽을 택했다. 그래도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갈 뿐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어떤 사람이 답답한 나머지 ‘성공할 가망도 없는데 헛고생 그만하라’는 투로 충고하자 그는 “매사에 자기에게 주어진 직분을 다할 뿐이고, 그 성공 여부는 운명을 주관하는 자의 몫이다.”라고 답했다.
문집에는 양명학과 중국의 사상가 양계초·강유위를 비판하는 대목이 몇 편이 있어 눈길을 끈다. 또한 사교재 글 중 압권은 화지안(花之安, 1839~1899, 본명 에른스트 파버)이 쓴 『자서조동(自西?東)』의 구절을 잘라내어 비판한 「서교변(西敎辨)」이다. 유교적 입장에서 예수교를 비판한 글이다. 이를 통하여 당시 유학자들이 예수교를 어떻게 보았는지를 엿볼 수 있다.
이 책의 핵심주제 중의 하나가 유학사상이지만, 사교재가 가르치고 퍼뜨리고자 한 성리학이 그리 어렵지 않다. 소통의 대상이 학생, 자식과 손자, 친구, 친척으로 모두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이었고,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그의 문제의식을 지금 시대 우리가 어렵지 않게 감정이입하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사교재의 글들 중에는 학자의 가난, 가난과 곤궁의 차이, 가난과 수신 등 ‘가난’이 매우 많다. 가난이 문제가 아니라 사는 ‘뜻’을 잃어버린 시대에 대한 경종이다. 청빈을 강조하는 수사가 아니라 시대 변화에 굳건하게 맞서겠다는 각오처럼 읽힌다. 시대의 가장자리에서 근대를 기록하다 『소학』의 실천 〉 외손자 재곤在坤에게
네가 지금 『소학』을 배운다. 학學[배우다]의 의미는 ‘본받는다’는 것이다. 『소학』을 배우는 것은 『소학』을 본받는 것이다. 본받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냐 ? 『소학』에 “발의 움직임은 무겁고, 손의 움직임은 공손해야 한다.”고 하면, 나는 즉시 발의 움직임을 무겁게 하고, 손의 움직임을 공손하게 해야 한다. 『소학』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밤에 늦게 잔다.”고 하면, 나는 바로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밤에 늦게 자야 한다. 『소학』에 “외출할 때 반드시 말씀드리고, 돌아와서 반드시 말씀드린다.”고 하면, 나는 곧 외출할 때 반드시 말씀드리고, 돌아와서 반드시 말씀드려야 한다. 이것이 본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배움의 명목은 있으나 배움의 실행이 없다. 평생 『소학』을 배워도 자신에게 조금도 도움 되는 것이 없으니, 어찌 크게 허망하지 않겠느냐. _본문 311쪽 중에서사교재가 남긴 자료는 윗글에 나오는 사교재의 외손자 이재곤 씨로부터 하영휘 교수가 2013년에 받아서 일차로 추리는 데 3년, 다시 읽으며 추려 2017년 1,400여 장의 사진파일을 만들었고, 다시 정독하여 선집을 확정하여 번역을 완료한 것이 2019년 6월이었다. 7년에 걸친 매우 힘든 작업이었을 것이다. 왜 무명의 유학자의 흩어진 글을 주워 모아 기록하려 했을까?
사교재 김영익은 전근대와 근대의 전환점에서 서서 두 시대를 살았다. 앞 시대에서 김영익은 ‘공부한 사(士)’로 주역이었지만 뒷시대의 유가들은 망국의 책임까지 덮어쓰며 서구적 근대의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비록 사교재는 서당의 훈장으로 전국을 떠돌지만 서구적 근대문명에 근본적으로 맞섰다. 역사는 뒷걸음질이다. 뒷걸음질은 다시 그렇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21세기 패러다임이라는 전환기에 선 우리에게 근대의 가장자리에 섰던 유학자의 사유와 실천이 눈여겨 보인다. 유학자의 눈으로 20세기 한국의 근대로 뒷걸음질쳐 볼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상품 정보 고시
도서명 변하는 세상에 맞선 유학자
저자 김영익
출판사 너머북스
출간일 2019-11-25
ISBN 9788994606569 (8994606564)
쪽수 528
사이즈 152 * 220 * 32 mm /748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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